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터 모델 (문단 편집) ==== [[르제프 전투#s-3.3|화성 작전]] ==== >3주 동안 4개 방면에서 동시에 진행된 르제프 동계 전투의 승리는 특히 독일군 지휘관 모델 장군의 역량 덕분이었다. 비교적 위험도가 낮은 전역에서 예비 부대를 만들어내어 최적의 순간에 승부처가 되는 전장(그는 모든 전역을 동시에 파악하고 있었다.)에 투입하는 탁월한 재능은 그의 방어전 승리에 가장 큰 요인이 되어 주었다. >---- >호르스트 그로스만 보병대장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 1942년 9월과 10월에 걸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독일군 주력이 집중되는 가운데 르제프 방면 소련군의 대공세에 관하여 독일군은 정보 기관마다 그 예측이 다르고 내용이 몇 번이나 번복되는 등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델과 9군 정보참모 분트로크 중령은 감청과 항공 시찰, 소련군 포로의 진술 등을 통해 11월 25일의 소련군 동계 대공세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폭설에 정찰기와 차량이 운행하지 못하자 모델은 군용 무한궤도 바이크로 매일 최전선을 오가며, 주요 방어 진지를 보강하고 지휘관들과 논의하여 이를 기반으로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증원 부대와 보급 물자를 요청했다. [[파일:Rzhev_Rshew_map_1942_Jan.jpg.jpg|width=700]] ||11월의 화성작전 부대 배치도로 위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9군의 공세적인 방어가 다대한 전공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1942년 9월, [[이오시프 스탈린]]이 [[미국 대통령]] 특사 웬들 윌키에게 제2전선의 개전을 요구하며 르제프 전투를 참관시켰을 만큼 이곳은 동부전선 최대의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11월 25일 새벽, [[이반 코네프]]의 서부 전선군과 막심 푸카예프의 칼리닌 전선군이 4개 방면에서 동시에 9군을 협공하여 대규모 포위망(화성 작전; Operation Mars)을 완성하려고 했으나 눈과 안개 때문에 목표물을 상실한 소련군 20군 포병대의 서전 포격은 아군의 진격에 방해가 될 만큼 지형을 파헤쳐 놓은 반면,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기갑대장의 39기갑군단은 이에 대비하여 후방 진지로 물러나 있었고, 독일군 포병과 보병은 방어 진지에 의해 제한된 소련군의 돌격로를 정확하게 예측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코네프의 서부 전선군은 첫날에만 투입한 보병의 절반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2개의 전차여단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주코프와 코네프는 공세를 강행했으나 비좁은 돌파구에 6전차군단과 제2근위기병군단이 몰리면서 병목현상이 발생, 이들은 모델의 주특기인 포병 집중 운용(HArko 307- Higher Artillery Command 307)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고 여기에 모델이 직접 지시한 슈투카 폭격까지 더해지며 20군과도 단절, 고립되고 말았다.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아르님]]은 증원 기갑 부대가 도착한 11월 29일에 이미 공세로 전환, 교과서적인 포위 섬멸전으로 각개격파를 지휘했다. 푸카예프의 칼리닌 전선군이 22군과 41군으로 벨리에 위치한 독일군 41기갑군단의 서부 방면을 공격하고, 39군이 북부 방면을 공격했으나 41기갑군단장 요제프 하르페(Josef Harpe) 기갑대장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소련군 선봉 부대들의 합류를 저지시켰고, 통신이 두절되자 모델이 직접 벨리 전선으로 와서 지친 전투 부대를 후방으로 배치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한 후, 중부집단군 예비부대인 12, 19, 20기갑사단을 41기갑군단에 증원시켰다.[* 독일군의 주공이 남부집단군에 집중된 탓에 9군의 전차 보유 대수는 편제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델은 연료를 충분히 확보하여 적재적소의 기갑 운용을 가능케 했다.] 이에 하르페는 돌출된 소련군 선봉 부대들을 각개 포위하여 섬멸시켰다. 마침내 12월 14일 늦은 밤, 주코프는 정식으로 소련군의 탈출을 허가했으나 간신히 확보한 탈출구에서도 HArko의 집중 포격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예하 기갑척탄병의 맹공이 가해졌다. 결국 화성작전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40,000명을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무려 335,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정예 전차군단 6개가 와해되었으며 85%의 전차 손실(1,852대) 및 대부분의 중장비들이 독일군에 노획되는 대패를 기록해야만 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최대 규모의 방어전 승리로 손꼽히며 현대 전사학계에서 르제프 공방전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